2024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두 번째 메이저대회 ‘제79회 US여자오픈’이 30일밤(한국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의 랭커스터 컨트리클럽(파70)에서 개막한다.
US여자오픈은 한국 선수들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대회다. 1998년 박세리를 시작으로 2008년과 2013년 두 차례 정상에 오른 박인비, 그리고 2020년 김아림까지 총 10명의 선수가 11번이나 패권을 차지했다.
최근 은퇴한 유소연도 US여자오픈 2011년 챔피언이다. 이제 막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유소연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승”이라며 “내 골프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고 돌아봤다.
● 신데렐라 스토리, 그 뒤에 숨겨진 사연
29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소연은 “전년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상금 상위권자(4위) 자격으로 초청을 받아 출전했다”면서 “2010년(공동25위)에 이어 두 번째 US여자오픈 출전이었는데, 우승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말 꿈같은 우승을 차지했다”고 기억했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브로드무어 골프장에서 열린 2011년 대회는 악천후 탓에 일정이 꼬이면서 파행을 거듭했다.
“당초 4라운드가 예정됐던 날에 3라운드 일정을 소화했는데, 나는 그날도 정규 72홀을 다 마치지 못했다. 결국 5일째 잔여 경기를 했고, 마지막에 버디를 잡아 연장으로 갔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유소연은 나흘째 일정도 일몰로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15번 홀까지 합계 2언더파를 기록해 이미 경기를 마친 서희경(3언더파)에 1타 뒤진 단독 2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마지막 날 재개된 잔여 3개 홀 중 마지막 18번(파4) 홀에서 극적인 2m 버디를 낚아 승부를 플레이오프로 끌고 갔고, 3개 홀 연장전에서 ‘파-버디-버디’로 2언더파를 쳐 ‘파-보기-파’로 1오버파에 그친 서희경을 3타 차로 꺾고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박세리(1998년), 김주연(2005년), 박인비(2008년), 지은희(2009년)에 이어 역대 다섯 번째 한국인 우승자였다. US여자오픈에서 태극 낭자가 나란히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것도, 한국 선수끼리 연장전을 치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초청 선수로 출전한 US여자오픈에서 깜짝 우승하며 신데렐라 스토리를 쓴 유소연은 이듬해 LPGA 투어로 건너가 2012년 LPGA 신인상, 2017년 LPG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 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7월 열린 대회에서 우승한 뒤 LPGA 관계자가 당장 LPGA에 데뷔하면 5년 투어 시드를 주고, 다음해에 (미국에) 건너오면 규정 탓에 1년 시드 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고 기억을 되살린 유소연은 “당시 학업(연세대 체육교육학과)을 병행하며 국내에서 투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원래 3학년을 마친 2011년 말에 퀄리파잉 토너먼트(QT)를 통해서라도 미국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예정대로 3학년을 마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5년 시드를 포기하고 결국 2012년에 미국 투어에 데뷔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숨겨진 사실 하나. 유소연은 “내가 1998년 초등학교 2학년 때 골프를 시작했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요일에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그런데 바로 그 주말에 US여자오픈 대회가 열렸고, 그 때 대회도 하루 순연되면서 한국시간 화요일에 박세리 선배가 우승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처음으로 ‘골프를 통해서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골프 선수로서 더 큰 꿈도 갖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러모로 US여자오픈은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대회”라고 덧붙였다.
● 후배들을 위한 고언(苦言)
유소연은 프로 데뷔 후 16년간 LPGA 6승(메이저 2승 포함),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10승(메이저 1승),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1승,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1승 등 통산 18승을 수확했다. 2017년 한국 선수로는 통산 세 번째로 롤렉스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에 올라 19주 연속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고, 2020년 6월 한국여자오픈에서 KLPGA 투어 통산 10승을 달성하며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5개국(한국·미국·일본·중국·캐나다) 내셔널 타이틀을 석권하는 새 역사도 열었다. 한국여자오픈 우승상금 2억5000만 원을 전액 기부해 당시 코로나19로 힘들어하던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동안 유소연이 사회 각 층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한 금액은 총 10억 원이 훌쩍 넘는다.
철저한 자기 관리는 물론이고 평소 주변을 돌아보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유소연은 2015년 LPGA 기자단이 선정한 ‘가장 우아한 선수상’과 2018년 LPGA 동료선수들의 투표로 투어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Williams and Mousie Powell Award’을 수상하는 등 빼어난 실력과 함께 훌륭한 인성을 갖춘 선수로 평가받았다.
지난 4월, 2017년 자신이 두 번째 메이저 우승 기쁨을 누린 셰브론 챔피언십에서 은퇴 경기를 갖고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유소연은 2011년 US여자오픈을 떠올리며 옛 추억에 젖은 뒤 이내 후배들을 위한 진정어린 조언도 건넸다.
올 시즌 한국여자골프는 LPGA 투어 개막 후 12번째 대회까지 우승을 신고하지 못하는 등 과거 화려했던 시절과 달리 투어 지배력이 훌쩍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미국, 일본 선수들은 물론이고 태국 등 동남아 선수들의 실력이 많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미국 무대에 도전하는 우리 선수들의 숫자가 최근 수년간 부쩍 줄어든 것도 한국여자골프가 LPGA 투어에서 과거처럼 큰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짚은 유소연은 “국내 무대 말고도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꼭 좀 알아줬으면 한다”는 말로 후배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투어에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아마추어 선수들도 더 많은 국제대회에 나갈 수 있도록 대한골프협회 차원에서도 많은 고민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위한 고언도 곁들였다.
“요즘 어린 선수들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 한다고 하더라. 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할 선수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주변에서 ‘LPGA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에게서 간절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난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돌아보니,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더라.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할 때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땀을 흘려야한다.” 선수 시절, ‘완벽주의자’로 불리며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유소연의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 은퇴해보니…“걱정이 없어 제일 좋아”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뒤 선수 시절부터 오랜 인연을 맺어온 타이틀리스트 브랜드 앰버서더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유소연은 현재 방송 출연과 강연 등으로 또 다른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조만간 해설자로 TV를 통해 팬들과 다시 만날 계획도 갖고 있다. 골프 코스 디자인, 골프 행정 등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은퇴 뒤 삶에 대해 묻자 “걱정이 없어 제일 좋다”며 웃은 그는 “얼마 전에 은퇴 후 처음으로 골프 연습장에 갔는데, 가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예전에 선수 시절에는 ‘60분 연습을 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되니 너무 좋더라”고 했다.
“사람들은 은퇴하면 시원섭섭할 것이라고 하던데, 나는 섭섭한 감정은 하나도 없이 시원하다”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어떻게 보면 그동안 나를 너무 다그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골프를 하면서 명예도 얻고, 돈도 벌었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은 나와 함께 해 준 가족, 그리고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요즘은 그렇게 가족,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골프는 내게 선생님 같은 존재다. 코스에서 어떻게 좋은 매니지먼트를 해야할지 고민하는 것부터, 골프를 통해 만난 소중한 인연까지 언제나 내 인생에서 큰 길잡이가 돼 줬다. 은퇴 후 내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에 대한 여러 선택지도 제공해주고 있어 너무 감사할 뿐이다.”